K-컬처 강경희 기자 | 가을은 내려앉는 계절이다. 잎은 위에서 아래로, 마음은 바쁨에서 성찰로 이동한다. 김미자 작가의 K-그라피 작품 ‘안도현의 가을엽서’는 이 ‘내려앉음’을 역설적으로 탑의 형식으로 쌓아 올린다. 시의 행들은 위로 향하지만, 뜻은 낮은 곳을 가리킨다. 그 긴장과 모순이 이 작품의 미학이다. 안도현의 시는 묻는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 김미자 작가는 이 질문을 글자의 배열로 답한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구는 마치 수행자의 계단처럼 한 단 한 단 내려오며, 가장 큰 글자 ‘사랑’이 화면의 하부에 자리한다. 사랑은 가장 아래에 있다. 가장 무거운 것을 가장 낮은 곳에 둔 구성이다. 색채는 계절의 감정을 대변한다. 주황, 연두, 붉은빛이 겹겹이 쌓인 하단부는 낙엽의 군집이자, 삶의 흔적이다. 그 위에 놓인 먹의 검정은 장식이 아닌 결단이다. 글씨는 곧고 힘차지만 과시하지 않는다. 이는 명인의 기교를 숨기는 태도이며, K-그라피가 지향하는 의미 중심의 서체다. 이 작품은 읽히는 시가 아니라 올라가며 내려오는 시다. 눈은 위에서 아래로 이동하고, 마음은 아래에서 다시 위를 돌아본다. 탑은 하늘을 향해 세워졌지만, 이 탑이 가리키는
K-컬처 강경희 기자 | 한국민화협회 송파지회 회원전 「우리들의 민화 이야기 4」가 2026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경인미술관 제3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송파지회의 네 번째 정기전으로, 전통 민화의 정신을 현대적 감각으로 확장해 온 지회의 여정과 성과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다. 송파지회는 2021년 지회 창설 이후 ‘전통에 기반한 동시대적 민화’를 기치로 삼아 꾸준한 창작과 교육, 전시 활동을 이어왔다. 민화가 오늘의 삶과 어떻게 호흡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며, 국적 있는 민화—한국적 미감과 상징을 분명히 지닌 민화의 가능성을 실천으로 증명해 왔다. 그 결과 매년 각종 공모전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고, 2025년 제18회 대한민국 민화 공모대전에서는 대상과 장려상을 포함해 총 31명의 입상자를 배출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송파지회장 조민(蓮松, CHO MIN) 작가가 있다. 숙명여대 미술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조민 작가는 현재 한국민화협회 대외홍보부회장과 송파지회장을 맡아 창작과 조직 운영을 병행하고 있다. 그는 전통 민화의 맥을 존중하되, 색감과 상징의 힘을 오늘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전시에 출품된
K-컬처 강경희 기자 | 어둠은 언제나 크고, 빛은 늘 작다. 그러나 세상은 그 작은 빛 하나로 방향을 정한다. 이경진 작가의 ,나는 반딧불,은 거대한 광명을 말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선택한 것은 스스로를 태워 길을 밝히는 미약한 생명의 빛, 그 이름 없는 존재의 윤리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굵은 필획은 외침처럼 보이지만, 그 결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외침이 아니라 다짐임을 알게 된다. “나는 반딧불이다.” 이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고백이다. 글씨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될 때... 이 작품에서 글씨는 정보가 아니다. 의미를 전달하기 이전에 태도를 드러낸다. 붓은 단정하지 않다. 먹은 번지고, 획은 떨리며, 화면에는 황금빛 점들이 흩뿌려져 있다. 이는 완결을 거부한 흔적이자, 삶의 불완전성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K-그라피가 된다. K-그라피는 잘 쓰인 글씨를 말하지 않는다. 잘 정돈된 그림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이 획에 삶이 있는가.” 반딧불은 스스로를 밝히지 않는다. 어둠을 밝힐 뿐이다 작품 속 서사는 낮고 조용하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언어 대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잠시 빛나는 존재의
K-컬처 이성준 기자 | 황보근형의 K-그라피 작품 「너에게 길이다」는 ‘보여주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건네기 위한 마음’으로 쓰인 글이다. 이 작품에서 ‘길’은 방향이 아니다. 도착지가 아니라 태도이며, 가르침이 아니라 동행이다. “너에게 길이다”라는 짧은 문장은 상대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내가 네 곁에서 함께 걸어주겠다.” 먹의 흐름은 단정하지 않다. 획은 흔들리고, 멈추고, 다시 이어진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안다. 이 길은 완성된 사람이 내미는 길이 아니라 같이 고민하는 사람이 내어놓은 길임을... 작품을 채운 연한 노랑과 초록의 색감은 봄의 식물처럼 말이 없다. 위로하지 않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저 “괜찮다”고, “지금 속도여도 된다”고 말하는 색이다. K-그라피는 글씨를 잘 쓰는 기술이 아니다. 삶의 문장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황보근형의 이 작품은 ‘너를 고치려는 글’이 아니라 ‘너를 기다리는 글’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선언이 아니다. 기도에 가깝다. 누군가의 하루 앞에 조용히 놓아두는 한 줄의 등불이다. 작가노트 | 황보근형 너에게 길이다. 이 글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문장이
K-컬처 이성준 기자 | 공재완 작가의 K-민화 〈책거리도〉(65×95cm)는 이러한 책거리의 고유한 미학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전통과 창조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다. 작품에는 문방사우, 향합, 부채, 두루마리 등 학문과 수양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다. 화려한 듯 절제된 색채 구성은 민화 특유의 친근함을 유지하면서도 섬세한 묘사와 깔끔한 구조 속에서 현대적 품격이 드러난다. 특히 작가는 붉은색·초록색·노란색을 안정적인 구도 안에 배치하여 생명력·조화·지혜를 상징하는 전통 색채의 상징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는 단순한 색의 대비가 아니라, ‘앎이 세상을 밝힌다’는 책거리의 철학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읽힌다.〈책거리도〉는 과거의 미감만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의 구조를 기반으로 오늘의 감성과 완성도를 더해 민화가 단순한 향토적 미술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의 무대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지닌 장르임을 증명한다. 공재완의 〈책거리도〉는 학문을 향한 염원, 삶을 성찰하는 마음,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정면에서 마주하게 만든다. 전통을 존중하되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작가의 태도는 민화의
K-컬처 이성준 기자 | 홍명 작가는 말한다. “2026년 병오년 새해, 진흙 속에서도 붉게 피어나는 연꽃 한 송이를 여러분 가슴에 살포시 얹어 드리고 싶어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는 2026년 1월 1일부터 5일까지 인사동 한국미술관 2층에서 기다릴게요. 겨울 바람이 차가워도, 이 연꽃은 따뜻하게 피어 있을 테니, 부디 오셔서 꽃잎에 손끝 한 번만 대 보고 가세요. 그 순간, 2026년 병오년 "붉은 말의 해" 이미 여러분의 것이 될 겁니다.” 이 연꽃은 진흙을 밟고 선 우리네 어머니다. 발이 빠개져도, 허리가 휘어도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워 올리는 그리움 그 자체다. 분홍 꽃잎이 살짝 벌어질 때 할머니가 새벽녘에 불을 밝히던 손때가 느껴진다. 먹빛 연잎 사이로 스민 차가운 이슬은 아버지가 삼키고 삼키던 한숨이다. 그래도 꽃은 피고, 그래도 잠자리는 날아와 우리 집 마당 한복판에 행운 한 점 내려앉힌다. K-민화란 이런 것이다. 백자처럼 하얀 종이 위에 수백 년 굽은 한의 먹을 풀고 그 위에 온 국민이 함께 울던 붉은 꽃을 피우는 것. 진흙 냄새가 진동해도 꽃향기만은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것. 내 이름도 연꽃이다. 홍명紅明. 진흙 속에서 붉게 빛나겠다는
K-컬처 이성준 기자 | 정원숙 작가의 모란도는 전통 민화가 지닌 길상의 의미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피워 올린 K-민화의 모범적 사례다. 화면을 가득 채운 모란은 부귀와 영화, 번영의 상징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 의미는 단순한 기원의 차원을 넘어 따뜻한 덕담처럼 다가온다. 붉은 모란과 흰 모란이 어우러진 화면은 대비보다 조화를 택한다. 강렬함과 순정함, 열정과 평안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 폭 안에서 공존한다. 이는 새해를 맞이하는 세화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한 해의 시작에서 모든 이에게 골고루 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색과 리듬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화면 하단의 괴석 표현이다. 단단하고 묵직한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반을 상징하며, 그 위로 뻗어 오르는 모란의 줄기들은 생명력과 확장의 에너지를 전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뿌리 깊은 삶 위에 피어나는 번영이라는 민화적 은유다. 정원숙의 모란은 과시하지 않는다. 색은 풍부하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구도는 치밀하지만 답답하지 않다. 이는 전통 기법 위에 쌓아 올린 숙련의 결과이며, 동시에 현대 민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용히 제시한
K-컬처 이성준 기자 | 행렬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식이며, 공동체가 공유한 질서의 시각적 선언이다. 이미형 교수의 ‘행렬도’는 이 오래된 개념을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리며, ‘질서의 미학’이 어떻게 예술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과 기물, 깃발과 악대, 의장대의 반복적 배열은 혼잡이 아니라 리듬을 만든다. 수백의 형상이 등장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무질서하지 않다. 각각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으며, 전체는 하나의 방향으로 흐른다. 이 작품에서 행렬은 권력의 과시가 아니라 공동체의 호흡이다. 전통 행렬도의 본질은 기록성과 상징성의 결합에 있다. 역사적 사건을 남기면서도, 그 사건이 지닌 위계·예법·미감을 동시에 담아낸다. 이미형 교수는 이 전통적 형식을 충실히 따르되, 색과 간결한 필치, 과감한 화면 분할을 통해 현대적 시선을 더한다. 덕분에 작품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관람자에게 말을 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거리감’의 처리다. 개별 인물은 소략하게 그려졌지만, 군집은 오히려 또렷하다. 이는 개인보다 질서와 관계가 중심이 되는 행렬도의 미학을 정확히 이해한 결과다. 가까이서 보면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