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 이성준 기자 | 금강산은 늘 하나의 질문이었다. 어떻게 그 많은 봉우리를 한 화면에 담을 것인가. 그리고 더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그 산을 어떻게 오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볼 것인가. 하미숙 작가의 '정선의 금강전도'는 이 두 질문에 동시에 답한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정수인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충실히 존중하면서도, 모사에 머물지 않는다. 화면을 채운 수많은 봉우리들은 위계 없이 솟아오르며, 산은 풍경이 아니라 존재의 집합으로 다가온다. 이 그림에서 산은 배경이 아니다. 각각의 봉우리는 하나의 인격처럼 서 있고, 능선은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처럼 겹쳐진다. 붓의 반복은 노동에 가깝고, 색의 절제는 묵언의 수행에 가깝다. 그래서 이 작품은 ‘본다’기보다 ‘들어간다’는 감각을 준다. 관람자는 어느새 금강산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금강산 속을 걷는 존재가 된다. 정선의 금강전도가 ‘실경을 통한 세계 인식’이었다면, 하미숙 작가의 금강전도는 ‘기억을 통한 세계 복원’이다. 실제로 갈 수 없는 산,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산. 이 그림은 분단과 단절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다. 산은 사라졌는가, 아니면 우리가
K-컬처 이성준 기자 | 봉황은 함부로 날지 않는다. 태평성대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면 노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봉황은 k-민화에서 ‘권력’보다 먼저 품격의 상징으로 그려져 왔다. 김민주 작가의 '봉황도'는 이 오래된 상징을 오늘의 언어로 조용히 번역해낸 작품이다. 이 봉황은 위엄으로 군림하지 않는다. 날개를 크게 펼치지 않고, 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대신 바위 위에 내려앉아 주변의 생명을 바라본다.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며, 곤충과 새들이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는 가운데 봉황은 중심에 있으되 중심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그림의 첫 번째 미덕이다. 작품의 구성은 위로 치솟기보다 아래로 뿌리내린 질서를 따른다. 바위는 흔들림 없는 토대처럼 봉황을 받치고, 그 위에 피어난 모란과 매화는 계절과 덕목을 동시에 상징한다. 모란의 풍요와 매화의 절개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봉황은 화려함 위에 서는 존재가 아니라, 절제된 풍요 위에 머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봉황의 깃털은 특히 인상적이다. 녹청과 주홍, 백색과 금빛이 겹겹이 쌓였지만 과장되지 않는다. 이는 기술의 과시가 아니라, 오랜 수행 끝에 도달한
K-컬처 이성준 기자 | 호랑이는 언제나 강하다. 그러나 박현정 작가의 '송죽설호'가 보여주는 강함은 포효의 크기가 아니라 버티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눈발이 흩날리는 설경 속, 송죽 사이를 가르며 내려오는 이 설호雪虎는 위협보다 결기를 먼저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겨울은 배경이 아니다. 겨울은 시험이며, 설호는 그 시험을 통과하는 존재다. 눈은 온 화면을 덮되 시야를 가리지 않고, 소나무와 대나무는 휘어질지언정 꺾이지 않는다. 박현정 작가는 이 자연의 질서를 통해 호랑이의 성정性情을 규정한다. 강함은 돌진이 아니라 지속이며, 용기는 소란이 아니라 침착이라는 선언이다. 호랑이의 발걸음은 낮고 무겁다. 한 발 한 발이 산의 결을 읽듯 이어진다. 이는 민화의 전통적 호랑이가 가진 해학이나 과장의 영역을 넘어, 현실의 무게를 감내하는 존재로서의 호랑이다. 눈을 밟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묘사는 단순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시간의 밀도를 화면에 심어 넣은 결과다. 색채의 선택 또한 절제되어 있다. 설경의 백색은 과도하게 번지지 않고, 호피의 선은 또렷하되 과장되지 않는다. 송죽의 녹은 차갑게 살아 있고, 바위의 회색은 계절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한다. 이는 기술의 과시가
K-컬처 이성준 기자 | 본 작품은 전통 민화에 담긴 길상과 염원의 의미를 오늘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현대 길상화입니다. 민화가 지닌 본래의 역할은 특정한 계층이나 시기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누구나 일상 속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삶의 그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지연 作 우리 전통 속에 담긴 다양한 염원과 길상의 상징을 바탕으로,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감정과 이야기를 화폭에 담고자 했다. 말과 책거리, 도구들..성취와 배움, 삶의 축적과 이어짐을 의미하며, 원형의 구조는 소망이 순환하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특정한 의미를 강요하기보다, 작품을 마주하는 각자가 자신의 바람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열린 길상화이기를 지향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시선을 머물렀을 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작은 위로나 잔잔한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전통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호흡할 때 살아난다고 믿습니다. 본 작품이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자리이자 새해의 좋은 기운과 소망을 전하는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작가노트 | 이지연 저는 전통을 재해석하여
K-컬처 이길주 기자 | k-민화 속 호랑이는 늘 질문을 던지는 존재였다. 권력의 상징이면서도 풍자의 대상이었고, 공포의 형상이면서도 익살의 얼굴을 지녔다. 그러나 이미형 교수의 '맹호도'에서 호랑이는 웃지 않는다. 대신 침묵한다. 이 침묵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긴장이다. 작품 속 맹호는 포효하지 않는다. 발톱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몸은 낮게 웅크렸고, 꼬리는 팽팽하게 말려 있다. 모든 힘은 밖으로 분출되지 않고 안으로 수렴된다. 이 호랑이는 공격 이전의 순간, 결단 직전의 정적을 품고 있다. 민화에서 보기 드문 이 태도는, 호랑이를 ‘힘의 상징’이 아니라 자기 통제의 상징으로 전환시킨다. 이 작품의 밀도는 선에서 나온다. 한 올 한 올 쌓아 올린 털의 묘사는 장식이 아니라 수행에 가깝다. 반복되는 붓질은 시간의 축적이며, 그 시간은 곧 인내의 흔적이다. 이미형의 맹호는 빠르게 완성된 힘이 아니다. 오래 견딘 힘, 쉽게 흩어지지 않는 힘이다. 눈빛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정면을 응시하지만 위협하지 않는다. 응시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잡기 위한 시선에 가깝다. 이 눈은 바깥을 향하지 않는다. 안쪽을 향해 있다. 그래서 이 맹호
K-컬처 장규호 기자 | 송학도는 오래된 약속의 그림이다. 소나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알고, 학은 시간을 건너는 법을 안다. 백찬희 작가의 '송학도'는 이 두 존재를 나란히 세워, 장수의 기원을 넘어 함께 사는 태도를 묻는다. 작품 속 소나무는 요란하지 않다. 굵은 줄기와 촘촘한 솔잎은 바람을 과시하지 않고, 학은 날갯짓을 멈춘 채 가지 위에 서 있다. 이 정적은 멈춤이 아니라 지속이다. 민화가 말해온 이상은 언제나 여기 있었다. 크게 외치지 않고, 오래 남는 것. 백찬희 작가의 '송학도'에서 소나무는 배경이 아니다. 학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자리이며, 계절의 흔적을 감내하는 몸이다. 학은 그 위에 앉아 있다가, 필요할 때 날아오를 줄 안다. 서로의 역할은 분명하지만 위계는 없다. 견디는 자와 건너는 자가 균형을 이룬다. 이 그림의 장수는 숫자가 아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오래 같이 사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송학도는 말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의 장면은 축복의 선언이 아니라 생활의 합의처럼 읽힌다. 채색은 낮고 단정하다. 청록과 백색, 갈색의 조율은 눈에 띄기보다 눈을 쉬게 한다. 깃털의 결, 솔잎의 밀도는 세밀하지만 과시하지 않는다. 이는 기술의 자랑
K-컬처 장규호 기자 | K-민화에서 화병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담는 그릇이며, 하루의 마음을 세워 두는 자리다. 공재완 작가의 '화병도'는 이 오래된 인식을 현대의 감각으로 단정하게 복원한다. 작품 속 모란은 흐드러지되 흐트러지지 않고, 화병은 화려하되 소란스럽지 않다. 모든 요소가 제자리를 알고 있는 듯한 안정감이 그림 전반을 감싼다. 모란은 말한다. 부귀와 영화는 과시가 아니라 지속의 결과라고. 겹겹의 꽃잎은 시간의 층위를 닮았고, 가지의 방향은 무질서가 아닌 리듬을 따른다. 공재완은 꽃의 크기를 키우기보다, 균형의 감각을 키운다. 그래서 이 화병도는 ‘보여 주는 그림’이 아니라 ‘곁에 두는 그림’이 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화병과 받침대의 처리다. 문양은 정교하되 절제되어 있고, 금색은 빛나되 앞서지 않는다. 이는 민화가 지닌 생활 미학의 집 안의 풍경과 마음의 질서를 함께 가꾸는 태도를 충실히 잇는다. 화병은 중심을 잡고, 꽃은 그 중심 위에서 호흡한다. 삶의 중심과 기쁨의 확장이 분리되지 않는 구조다. 색채는 부드럽게 호흡하며, 여백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여유다. 보는 이는 해석을 강요받지 않고, 자연스레
K-컬처 이길주 기자 | 민화의 장수는 언제나 엄숙하지 않았다. 오래 산다는 뜻은 무게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잃지 않는 일에 가까웠다. 황현진 작가의 '해학반도도'는 그 사실을 한 장의 풍경으로 풀어낸다. 반도蟠桃의 풍요와 학의 고결함, 파도의 반복과 구름의 유영이 모든 상서가 모였는데도 화면은 과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소가 먼저 온다. 복숭아나무는 바람을 타고 굽이치며, 학은 가지 위에 앉아 서로의 균형을 살핀다. 바다는 규칙적인 파문을 만들고, 구름은 그 위를 가볍게 건너간다. 여기에는 힘의 과시가 없다. 장수는 위에서 내려오는 축복이 아니라, 관계의 리듬에서 생겨난다는 민화의 지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해학’이라는 제목은 정확하다. 웃음은 대상이 아니라 태도다. 반도는 크되 위압적이지 않고, 학은 고상하되 거리 두지 않는다. 파도는 세차되 질서를 잃지 않는다. 황현진은 상서의 요소들을 서로 밀치지 않게 배치해, 장수의 조건을 ‘공존’으로 제시한다. 오래 살려면, 먼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색은 부드럽고 선은 절제되어 있다. 이는 민화가 지닌 생활의 미학에서 과잉을 경계하고 반복을 신뢰하는 태도를 현대적으로 계승한다. 작품속의 여백은
K-컬처 이길주 기자 | k-민화에서 귀수龜壽는 단순한 장수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대하는 태도이며, 삶을 축적하는 방식이다. 이한나 작가의 '모란귀수도'는 바로 그 태도를 한 화면에 단단히 쌓아 올린 작품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거북이 있다. 그러나 이 거북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지탱한다. 그 등 위에 놓인 것은 책과 문방구, 상자와 도구들, 지식과 기술, 그리고 생활의 흔적이다. 빠르게 소비되는 정보가 아니라, 오래 곁에 두고 익혀야 할 것들이다. 거북의 느린 걸음은 이 모든 것의 필요조건처럼 보인다. 모란은 화면 위에서 피어 있다. 화려하지만 과장되지 않고, 중심을 침범하지 않는다. 민화에서 모란은 부귀의 상징이지만, 이 작품에서의 모란은 결과에 가깝다. 충분한 시간과 인내가 쌓인 뒤에야 허락되는 꽃. 그래서 모란은 서두르지 않는다. 문양과 질감은 치밀하다. 나무결, 직물의 반복, 기하학적 장식은 손의 시간을 증명한다. 이는 기술의 나열이 아니라 노동의 윤리다.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것을 버리지 않는 태도의 이한나 작가는 그 태도를 화면 전체의 구조로 삼는다. 이 작품의 흥미는 균형에 있다. 무거운 것은 아래에서 받치고, 가벼운 것은
K-컬처 장규호 기자 | k-민화의 고양이는 늘 모순을 품는다. 온순함과 야성, 정적과 도약, 놀이와 사냥의 경계에 선 존재. 안경화 작가의 '화묘도'는 이 오래된 상징을 한 장면의 리듬으로 엮어, 삶의 ‘지금’을 포착한다. 작품 위에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하나는 가지 위에서 몸을 낮추고, 다른 하나는 땅 위에서 시선을 들고 선다. 위와 아래, 잠복과 관조. 이 대비는 우열이 아니라 역할의 교차다. 민화가 말하는 세계는 늘 그렇듯,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중심의 공존으로 이루어진다. 나비와 잠자리는 움직임의 신호다. 공중을 가르는 작은 생명은 화면에 긴장을 불어넣고, 고양이의 시선은 그 긴장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린다. 이때 고양이는 사냥꾼이기 이전에 관찰자가 된다. 급하지 않고, 소리 없이. 안경화 작가는 이 느린 호흡으로 k-민화의 미학을 오늘의 감각에 맞춰 낮춘다. 꽃은 아래에서 피어 오른다. 붉고 분홍의 화훼는 장식이 아니라 완충의 장치다. 야성의 긴장을 부드럽게 받치며, 화면의 균형을 회복시킨다. 민화의 꽃은 늘 그렇게 기능한다. 극적인 순간을 과장하지 않고, 머물 수 있게 만드는 자리로. 색채는 절제되어 있다. 고양이의 털결은 세밀하되 요